<딥메디슨>을 읽고

들어가며
2020년 코로나가 본격화되면서 원격의료와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일 때 주변 의사분들의 페이스북 글에서 이 책이 언급되는 것을 계기로 책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어떤 책이든 갑자기 사고 싶은 날에 이 책을 사게 되었고 그러고도 1년 넘게 책장에 남겨두었습니다. 작년에 한국의 의료 인공지능 회사들의 주식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과연 좋은 투자일지 고민을 하다가 이 책을 읽어야겠다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책에 대하여
책장을 펼치기 전에는 이 책이 인공지능을 ‘주어’로 두고 ‘목적어’인 의료를 얼마나 혁신적으로 바꿀지 많이 설명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의료’가 주어인 책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면 이러한 구성이 저자 스스로가 심장전문의이자 의료인이라는 특성이 담긴 면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자는 딥메디슨은 하나의 큰 지향점이자 모델로 보고 있고, 이 모델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를 나누어서 이야기합니다. 이 세 개의 딥컴포넌트(심층 요소)는 딥피노타이핑, 딥러닝, 딥엠퍼시 및 딥커넥션 입니다. 딥피노타이핑(deep phenotyping)은 한 개인의 모든 의료 데이터를 심층적으로 정의하는 능력입니다. 개인의 병력, 사회력, 행동력, 가족력, 생물학적 요소, 환경적 요소까지 모두 포함해서 한 개인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딥러닝은 딥피노타이핑보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으로, 패턴 인식 및 기계학습을 넘어 의료 의사결정에 지침을 제공하고 가상 의료 코치와 같이 광범위하게 발달하는 기술을 말합니다. 딥엠퍼시(deep emphathy)와 딥커넥션(deep connection)은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말하는 부분으로써, 인공지능의 도입으로 의료계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효용은 오진율이나 업무량의 감소, 암의 완치가 아니라, 환자와 의사 간의 유대 관계와 신뢰의 회복이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책은 전체적으로 기술적인 가능성, 한계, 법적 책임, 보건 시스템, ‘치유’로서의 의료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제가 처음부터 관심 있었던 인공지능이 혁신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부분을 책에서 소개해 줍니다. 특히 인공지능이 앞으로 더 잘할 부분은 ‘패턴형 업무’의 유형들 입니다.
- 개인별 빅데이터는 진단과 치료의 정확성을 높일 수 있다.
-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8,000만 건의 CT 스캔 중 30~50%는 불필요한 것으로 추정된다.
- 미국에서 전체 의료비 중 약제 비용의 비중은 높아져 가는데 전체적으로 주요 약물을 복용하는 환자의 75%에서는 기대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 의사의 교육과정은 분석력보다는 직관력을 키우도록 훈련되었다. 그들이 경험한 환자의 사례들을 기반으로, 반사적으로 작용하는 의사 결정에 특화된 것이다.
- 수련을 마친 후, 의사들의 진단 역량 수준은 일생 거의 변화가 없다. 놀랍게도 의사로서 생활하는 동안 진단 능력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시스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피드백을 받지 않는다면 당신의 자신감은 정확성보다 훨씬 빠르게 커진다.
- 패턴 인식의 영역
- 의료 영상, 병리 슬라이드, 심전도, 호흡 음성 인식, 망막 영상, 뇌 영상 등의 패턴 인식의 영역에서 인공지능의 진단 정확도가 더 높아지고 있다.
- 임상 의사결정 보조 시스템
- 인공지능이 진료실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제대로 기록하고 의료 비서로서 역할 한다면 의사들은 이제 차트가 아닌 환자를 보게 될 것이고 환자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
- 인공지능은 환자 데이터 검토, 진단명 추정, 검사의 제안, 약물 알레르기 및 약물 상호작용 알람 표시, 투약 오류 방지 등 의사의 업무를 좀 더 용이하게 하고 진료 수준을 개선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 특정 분야에 이미 특화되고 있는 인공지능
- 심장내과 의사 - 심전도와 심초음파 분석
- 암 전문의 - 종양학만큼 풍부하고 광범위한 데이터세트를 통해 최신 진단 및 치료법이 새롭게 개발되고 있는 분야는 없다. 모든 암은 환자마다 고유하며 다양한 층위의 특징을 지닌다. IBM의 왓슨이 처음 헬스케어에 진출했을 때, 사업 목록의 1순위가 종양학 분야였음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 외과 의사 - 개별 환자의 데이터와 수술 영상에 대한 기계학습은 과거의 수술 방식을 재정립하고 수술 성적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책의 한 장은 ‘심층 다이어트’라고 제목을 붙이고 영양학 분야가 혁신이 부족하고 비과학적인지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질병과 치료 수준의 더 깊은(?) 의료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왜 다이어트일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더 광범위하게 건강의 관점에서 보면 식단이 기본 요소이기 때문에 충분히 납득이 되었습니다. 이 장에서도 인공지능이 사람의 식단을 혁신시킬 수 있다는 주장보다는, 식단과 영양학이 얼마나 정형화, 패턴화가 어려운 분야인지 그렇지만 얼마나 개인화가 필요한지에 대해 열심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책의 마지막 장은 결국 인공지능으로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의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의료인들도 우울증이나 환멸감에 시달리는데 이러한 증상의 상당 부분은 본인들의 임무를 인본주의적 방식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저자는 인공지능은 환자와의 시간이란 선물을 얻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 ‘존재’라고 하는 익숙하지 않은 개념을 들고 오는데, 환자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듣고 공감함으로써 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해 주고 신중하고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소프트 스킬 훈련을 위해 실제로 예일 의과대학 학생들을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내게 하면서, 보이는 것 너머의 의미를 관찰하도록 훈련한다는 이야기도 해줍니다. 그러면서 치료와 치유의 차이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와닿습니다. “우리는 아마도 질병 치료(cure) 이상의 무언가를 찾고 있다. 이를 치유(healing)라 부르자. 만일 당신이 강도를 당했다면 다음날 범인이 잡히고 모든 물건을 되찾더라도 당신은 온전히 회복되었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치료는 됐지만, 치유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신적 피해가 남아 있을 테니 말이다.”
마지막에 저자는 우리가 여전히 의료 인공지능의 초창기에 머물러 있다고 말합니다. 인공지능이 단순히 의사의 업무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들이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말하며 의료 인공지능을 긍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의료 인공지능의 장점을 인류가 누리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단서를 남기고 있습니다. “개인이 자신의 의료 데이터를 소유 및 통제해야 하고, 의사들이 생산성 향상을 위해 인간관계 개선을 희생하려는 행정 직원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며, 데이터 프라이버시와 보안을 보장하는 철저한 조치를 해야 한다는 단서가 따른다.” 사실 이 단서들이 각각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큰 빙산과도 같은 과제들이라 인류가 과연 이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 저 또한 의문이 들며 씁쓸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2020년에 출간되었는데 사실 2024년인 지금 읽어도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의료 인공지능이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는, 의료 인공지능이 가야만 하는 길은 분명하고 어떤 방향으로 주변 사람을 설득하며 갈 수 있을지에 대해 이 책이 의료인으로서 말해주고 있다 생각합니다.
나가며
이 책 또한 제가 책장을 펴기 전과 닫은 후의 깨달음이 달랐던 책입니다. 책은 이런 매력이 있습니다. 책을 읽고 난 지금은 딥메디슨이 더 따뜻한 개념으로 느껴집니다. 저는 인공지능을 주로 업무 ‘효율’의 관점에서 들여다보았었고 인공지능이 직접적으로 대체하는 기능과 역할에 주목해 왔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인공지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인간다움에 더 주목할 수 있게 된 것이 놀랍고 또 감사합니다. 인공지능이 더 잘할 수 있는 능력(최신 의학 지식, 방대한 데이터 통합, 데이터 처리 등)을 도맡게 되면 의사들은 본인들의 일을 인공지능에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료인이 인간으로서 고유하게 할 수 있는 일을 더욱 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사실 한국도 작년부터 의료파업, 의대 정원 이슈로 시끄럽습니다. 각 이해관계자가 각자의 주장이 더 우선적이고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을 때 오히려 전혀 관계없는 제3자인 인공지능을 개입시켜서 미처 보지 못했던 win-win 전략을 모색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저 또한 직접적인 이해관계자가 아닌 입장이지만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책의 표지와 제목만 보았을 때는 마치 논문처럼 어려운 내용들만 많을 것 같아 읽기를 계속 미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의사 입장, 환자 입장, 엔지니어 입장, 정책 입안자 입장 모두에게 우리가 인간으로서 갈구하는 ‘치료’보다도 ‘치유’할 수 있는 의료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 책이 각자에게 의미 있는 메세지를 던져준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마지막에 우리가 원하는 의사는 어떤 의사인지를 묘사하는 부분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당신이 깊은 고통을 경험해 보았다면 그것이 얼마나 외롭고 고립된 느낌이지, 왜 아무도 당신의 분노와 절망과 같은 느낌을 알지 못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그 순간에는, 당신이 신뢰하는 의사, 고통이 곧 끝날 것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하겠다며 당신의 자신감을 북돋워 주는 의사의 격려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